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는 해고라는 현실적 폭력 앞에서 무너지는 중년 남성의 비극을 블랙코미디로 담아낸 작품입니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더 엑스'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이 영화는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9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완벽해 보이던 가정의 가장 유만수가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면서 겪는 추락을 통해, 우리 시대의 노동과 정체성, 그리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폭력의 문제를 날카롭게 파헤칩니다.
실직의 공포: 도끼질당한 정체성
태양제지에서 20년 넘게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온 유만수는 펄프맨상까지 받은 인정받는 제지 전문가입니다. 그러나 미국계 사모펀드가 회사를 인수하면서 그는 하루아침에 구조조정의 희생양이 됩니다. "미국에서는 해고를 도끼질한다"는 대사처럼, 경력이 길다는 것은 곧 연봉이 높고 나이가 많다는 뜻이기에 도끼는 가차 없이 그의 목을 칩니다.
만수에게 '제지맨'이라는 정체성은 단순한 직업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난 이렇게 살게 돼 있어. 어쩔 수가 없어"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25년간 종이밥을 먹어온 것이 단지 생계 수단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카페를 내자고 해도 "종이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했던 그에게, 제지업은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좌표였습니다.
실직 후 3개월간의 필사적인 구직 활동은 처절합니다. 면접장에서 "당신의 단점이 뭔지 말해 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싫은데요. 라고 말하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답하는 장면은 그가 얼마나 자존심을 구겨가며 버티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구두 가게 점원이 된 전직 제지 전문가 고시조를 보며 만수가 느끼는 불편함은, 곧 자신의 미래를 보는 것 같은 공포에서 비롯됩니다. 해고는 단순히 돈을 못 버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할 수 없게 되는 존재론적 위기였던 것입니다.
영화는 이런 실직의 공포를 만수의 어린 시절 기억과 연결합니다. 아버지의 죽음 후 집에서 쫓겨났던 경험은 그에게 "세상은 언제든 나를 밀어낼 수 있다"는 불안을 각인시켰습니다. 그래서 다시 되찾은 그 집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라, 다시는 무너지지 않기 위한 성벽이자 자신의 성취를 증명하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직접 손보며 창고와 온실을 지었다는 그의 말에서, 그 집은 곧 그의 인생 그 자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존재론적 위기: 어쩔 수 없다는 합리화
"당신이 사라져야 내가 살아"라는 만수의 말은 그가 도달한 극단적 결론입니다. 공정한 경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그는 같은 자리를 노리는 실직자들을 제거하기로 결심합니다. 알코올 중독자 9번모, 구두가게 점원으로 전락한 고시조, 그리고 잘나가는 제지회사 반장 최선출. 이들 역시 만수처럼 종이밥을 수십 년 먹어온 인생들이며, 각자의 방식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동질감 있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평범한 아재인 만수의 계획은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9번모의 집에서 총을 두고 벌이는 몸싸움은 조용필의 '고추잠자리' 음악에 맞춰 코믹하게 연출되며, 예측과 슬립스틱과 폭력 사이를 오갑니다. 타겟들을 향한 동질감과 연민이 교차하면서, 만수의 "어쩔 수가 없다"는 대사는 관객에게 새까만 웃음을 피식피식 세워나오게 만듭니다.
"어쩔 수가 없다"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문입니다. 미국 본사도 해고를 통보하며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만수도 살인을 앞두고 스스로를 세뇌하듯 이 말을 반복하며, 새로운 고용주 역시 AI 자동화 시스템 도입을 정당화하면서 같은 말을 합니다. 하지만 영화가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정작 어쩔 수 없는 것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집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할 수도 있었고, 아내의 조언처럼 다른 업종으로 전환할 수도 있었으며, 택시 운전을 하는 장인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수는 그것이 자신이 누리던 삶과 멀어지는 방법이라고 여겨 결국 비열한 폭력의 길을 택합니다. 처음에는 망설이고 두려워하며 실수도 했지만,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 망설임은 줄어듭니다. "가족을 위해서"라는 폭력의 당위가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기 시작하죠. 특히 어금니를 스스로 뽑는 장면은 마지막 남은 양심의 목소리를 강제로 지워버리는 순간처럼 느껴집니다. 만수의 살인 말고도 영화 곳곳에서 인간적 몰락의 징후가 보입니다. 아내의 불륜을 의심해 가정의 균열을 일으키고, 의붓자식에게 "친구가 그런 거"라고 암시하며, 최선출의 집에서는 끊었던 술을 다시 입에 댑니다. 이런 행위들이 살인보다 더 타락적으로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는 주문 밖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침묵: 공범이 된 사랑
손예진이 연기한 아내 미리는 이 영화의 정서적 중심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원하는 게 뭔지 정확히 직시하고 있으며, 닥친 상황을 활용하는 현실주의적 면모를 지닌 인물입니다. "싱글맘한테 청혼했던 그 용감한 총각 어디 갔나? 나도 새 출발했잖아. 당신도 할 수 있어"라고 말하며 남편을 다독이지만, 동시에 가족들의 운명을 조율하며 실질적인 결단을 내리는 강인한 여성입니다.
미리의 선택에서 가장 서늘한 지점은 침묵입니다. 그녀는 모든 걸 알고도 침묵을 선택합니다. 이 침묵은 가정을 지키기 위한 현실적인 선택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후반부에서 만수를 바라보는 미리의 표정은, 이 가정이 이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아름답고 매혹적이지만 전화가 울리면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는 남편을 들었다 놨다 하는 그녀의 경이로운 회복력 안에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폭력에 대한 복잡한 공모가 담겨 있습니다.
영화는 "내 가족을 위해서"라는 명분이 얼마나 위험한 합리화인지를 보여줍니다. 만수 같은 아버지, 남편들의 마음속 어딘가에는 이런 폭력의 당위가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있을 것이기에,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에 비수가 꽂힙니다. 가족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저지른 범죄는, 결국 그 가족 자체를 파괴하는 아이러니를 낳습니다. 침묵으로 공범이 된 가족들은 더 이상 순수한 피해자가 아니며, 그들이 함께 지켜낸 일상은 피로 얼룩진 거짓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마지막 면접 자리에서 만수는 "적어도 한 명 정도는 필요하지 않냐"라고 말하며 결국 그 자리를 꿰찹니다. 하지만 로봇이 종이를 옮기는 불 꺼져가는 공장에서 "이젠 됐다"며 쾌재를 부르는 그 장면이 뼈 아프게 슬픈 건,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라서입니다. 그가 지키려 했던 자리는 이미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작아져 있었고, 잠깐의 안도감 뒤에는 다시 불안이 기다리고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만수의 무의미한 책략은 무의미했고, 결과조차 공허합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병헌이라는 배우를 통해 평생 한 번 만나기 힘든 복잡한 캐릭터를 완성했습니다. 카리스마를 드러내고 무너뜨리며 부조리를 드러내는 그의 연기는, 행위는 전혀 공감할 수 없지만 동기는 이해 가능한 그 선을 정확히 유지합니다. 박희순, 이성민, 차승원 등의 조연들도 각자 잔혹한 시스템의 희생양으로서 기묘한 면모를 순간적으로 드러내며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어쩔 수가 없다'는 자본주의의 도끼질 속에서 판없이 취약한 남성이 지배하던 삶을 잃고 어떤 끔찍한 깨달음에 도달하는지를 보여주면서도, 노동자를 수십 년간 써먹다가 한순간에 내버리는 부조리한 시스템을 고발합니다. AI와 자동화라는 현대적 공포를 겹쳐 담아내며, 코미디의 외피 속에 비극적 통찰을 숨겨둔 이 작품은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의 무게를 관객에게 그대로 넘깁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던 선택이었을까. 영화는 정답을 주지 않고, 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살다 보면 우리도 종종 "어쩔 수가 없었다"라고 말하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그 말 한마디를 조금 더 조심하게 됩니다.
[출처] 기묘한 케이지: https://www.youtube.com/watch?v=77Yes279dV8